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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보는 세상이야기] 꽃다지_점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20.
자신의 일터를 '점거'해야했던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

2000년 10월11일 대전 산업대학교에선 한국통신 정규직 노조(지금의 KT 노동조합)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한국통신 노동조합은 비정규직을 조합 가입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약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모두들 분노했지만 어이없게도 이 개정안으로 인해 비정규직이 독자 노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2000년 10월 14일, 정규직노조의 가입승인이 떨어지지 않아 노조가입을 하지 못하던 계약직 노동자 1,490명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통신은 전국 8천여 명의 계약직 노동자들을 2000년 12월 31일자로 계약해지하고 도급업체로 전환해버립니다.

이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영하 20도에서의 노숙농성, 한강대료 고공 시위, 목동 전화국 점거농성, 국회본회의장 농성, 광케이블 고공시위 등의 투쟁을 전개합니다. 이 과정에서 28명이 구속되고 100명이 불구속 기소, 200명이 즉심에 넘겨졌지요. 그리고 10억의 손해배상이 떨어졌고 결국 2002년 5월 12일, 사측과 합의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도급업체 취업보장, 민형사상 책임 면제, 노조해산과 위로금.. 합의내용의 전부였습니다. 싸움을 시작한지 517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에 정규직노조의 연대는 없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조원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심지어 2000년 12월 19일 정규직노조가 파업집회를 열던 명동성당에 찾아간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외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만약 그때 한국통신 정규직노조가 연대하여 싸웠다면 2012년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 이후,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아산 공장에서 전주 공장에서,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에서, 하이닉스, 현대하이스코, KM&I, 기륭전자, KTX여승무원…….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100일, 500일 투쟁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약 없는 기나긴 싸움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투쟁에 돌입하는 순간 최소한 1,000일 투쟁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점거>는 비정규직 투쟁이 낯설던 시절,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동사옥 점거농성을 접하고 만든 노래입니다.

특정 사업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노래임에도 1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현실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증가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과의 임금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같은 라인에 근무하는데도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엄청난 임금격차를 감수해야하고 그나마도 잘리까봐 눈치를 봐야 합니다. 전체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비율이 46.2%라고 합니다. 향후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정부는 말로는 정규직에 대한 과한 혜택을 줄여서 비정규직에게 부당한 대우를 줄여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 격차는 커지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10여 년 전에 특정 사업장 노동자들의 삶을 담은 노래가 여전히 유효한 현실, 2011년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이른 새벽 어둠을 밟고 무심히 지나치는 행인의 표정이 싸늘히 목덜미를 눌러도” 라던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괴감은 수년 후 기륭전자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며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돌리다 받는 모멸감에 그대로 이어집니다.

“흔한 카메라 한 번 터트리는 기자들 눈엔 띄지 않고 띄지 않고”라던 탄식은 오늘 이 순간에도 유성노조 노동자들이 겪는 현실로 2011년까지 이어집니다.

참으로 절망스럽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타인이 주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립된 희망 정규직의 꿈을 안고서 일터를 빼앗아 버린 그 전화국으로 전화국으로 뛰어든다”라고 했던 절망스런 현실은 지금도 이어지지만 어느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던 2000년대 초반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느꼈을 그 고립감을 우리는 비로소 끊어내고 있습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싸움을 1895일간 함께 사람들이, 홍대청소노동자들의 싸움에 발랄하게 결합했던 젊은 사람들이, 그리고 4차에 걸쳐 희망버스에 탑승했던 바로 당신이 고립된 희망에 눈을 돌리고 함께 하는 순간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희망은 우리 속에서 찾고 싶습니다.
같이 살자고 외치는 우리 속에서…….
함께 하는 우리 속에서…….
그래서 어느 날인가 <점거>라는 노래가 가슴 아픈 절규가 아니라 ‘그땐 그랬지’라며 웃으며 추억으로 기억하는 노래가 될 날을 그려봅니다. 너무 멀지 않은 날이겠지요?


점거

오동길 글/조성일 작곡/꽃다지 노래

멀리 보이는 빌딩 숲 사이

전선 가닥 어깨에 메고 맨홀 속으로

기어 들어가던 시간들이 흐릿하게 지나간다 지나간다

십 년 그 노동이 눅눅히 베인 작업복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계약 해지의 그 기억이

비장하게 스쳐 가고 스쳐가고 음 스쳐가고

이른 새벽 어둠을 밟고 무심히 지나치는

행인의 표정이 싸늘히 목덜미를 눌러도

흔한 카메라 한 번 터트리는 기자들 눈엔 띄지 않고 띄지 않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립된 희망

정규직의 꿈을 안고서 일터를 빼앗아 버린 그 전화국으로

전화국으로 뛰어든다 뛰어든다

공연영상 링크  http://www.hopesong.com/xe/86548

<2008년 10월 콘서트 '나를 바다로' 공연 실황 중에서>

* 이 글은 새세상연구소 웹진 2011년 9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